경주 봉황대
이 봉황대는 높이 22m, 밑둘레가 250m나 되며 외형이 단일 봉분으로 된 신라 시대 무덤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큰 것으로 크기로 보아 왕릉으로 추정된다.
주위에서 발굴조사된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등의 구조로 보아 이 무덤 역시 목곽 안에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후 목곽 밖으로 냇돌을 쌓아올리고 다시 그 위로 흙을 쌓아올려 봉분을 만든 4~5세기경의 신라 적석목곽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봉황대란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고 풍수지리설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경남 대릉원 황남대총
황남동 제98호분이라고도 한다. 경주시내의 고분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두 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표형분(瓢形墳)이다. 거의 원형이 유지된 무덤의 규모는 동서 80m, 남북 120m, 높이 22.2m(南墳) ·23m(北墳)로 1973년도부터 1975년도까지 문화재관리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의 발굴조사에 의해 남분이 북분보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경주 내물왕릉
제188호. 보호구역 1만 2818㎡. 401년경 조성. 경주 향교(鄕校)의 북방 얕은 언덕 위에 있으며, 대형의 둥근 토분(土墳)이다. 봉분의 밑면 주변에 자연석의 한 모서리가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무열왕릉(武烈王陵)의 경우와 같이 그 안에 별도의 호석(護石)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에 첨성대(瞻星臺)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현위치와 일치한다. 초기의 왕릉으로서는 비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경주 첨성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복원사업중인 월정교 (사적 제457호 일정교지.월정교지)
‘원효대사는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고 전하는 경주의 월정교지는 통일신라시대 월정교 옛터이다. 이때에 원효대사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리요?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겠노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무열왕은 그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대사를 보내도록 한다. 원효대사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월정교(혹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신하를 보고는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지니, 신하는 월정교 바로 옆의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고,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60년 경덕왕(景德王 19) 때에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일정교(日淨橋), 월정교(月淨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춘양교(春陽橋)라고도 불리었던 일정교는 월정교의 동쪽으로 약 700m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월정교(月淨橋)는 조선시대에 와서 월정교(月精橋, 淨->精)로 표기되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길이 60.57m의 월정교 아래 교각 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편이 출토되어, 교각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센 물살에 견디도록 교각을 배모양으로 쌓았다.
요석궁은 월정교터를 건너면 나오는 마을터에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 경주 최부자집터로 바뀐 뒤에 현재는 음식점 등이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월정교 아래를 흐르는 문천(蚊川)에서는 지금도 고둥 등을 줍는 아낙들이 있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월정교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경주 안압지
안압지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4년(A.D. 674)에 축조된 신라의 궁원지(宮苑池)이다. 한반도 동남부에 고립된 신라는 668년 고구려를 정벌하고 676년에는 당군(唐軍)을 몰아내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게 되고 토속적인 고신라문화에서 벗어나 국제적이고 선진적인 감각을 익혀나가게 되는데 안압지의 축설은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안압지는 당나라 장안에 있는 대명궁(大明宮)의 태액지(太液池)나 백제 궁남지(宮南池)의 조경술(造景術)을 본받은 것으로, 이러한 궁원지 조경의 기술과 관념은 “문무왕 14년 2월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와 같이 중국의 조경문화에서 온 것이다.
성덕대왕신종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봉덕사(奉德寺)종으로도 불리우며, 높이가 3.6m에 달하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크기나 양식 면에서 볼 때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명문에 의하면 경덕왕(景德王)이 부왕 성덕왕(聖德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다음 대인 혜공왕(惠恭王) 7년(771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으며, 이 종을 제작하는 데 구리 12만 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종은 어린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다는 전설과 함께 종소리가 어머니를 부르는 듯하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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